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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기
피천득 수필 '인연'
조회수 | 3
작성일 | 21.05.18
피천득 수필 '인연'

지난 사월, 춘천에 가려고 하다가 못 가고 말았다. 나는 성심(聖心) 여자 대학에 가 보고 싶었다.
그 학교에, 어느 가을 학기, 매주 한 번씩 출강한 일이 있었다. 힘드는 출강을 한 학기 하게 된 것은, 주 수녀님과 김 수녀님이 내 집에 오신 것에 대한 예의도 있었지만, 나에게는 사연이 있었다.
수십 년 전, 내가 열 일곱 되던 봄, 나는 처음 도쿄(東京)에 간 일이 있다. 어떤 분의 소개로 사회 교육가 M 선생 댁에 유숙(留宿)을 하게 되었다. 시바쿠(芝區)에 있는 그 집에는 주인 내외와 어린 딸, 세 식구가 살고 있었다. 하녀도 서생(書生)도 없었다. 눈이 예쁘고 웃는 얼굴을 하는 아사코(朝子)는 처음부터 나를 오빠같이 따랐다. 아침에 낳았다고 아사코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고 하였다. 그 집 뜰에는 큰 나무들이 있었고, 일년초(一年草) 꽃도 많았다. 내가 간 이튿날 아침, 아사코는 스위이트 피이를 따다가 화병에 담아, 내가 쓰게 된 책상 위에 놓아 주었다. 스위이트 피이는 아사코같이 어리고 귀여운 꽃이라고 생각하였다.성심 여학원 소학교 일 학년인 아사코는 어느 토요일 오후, 나와 같이 저희 학교에까지 산보를 갔었다. 유치원부터 학부(學部)까지 있는 카톨릭 교육 기관으로 유명한 이 여학원은, 시내에 있으면서 큰 목장까지 가지고 있었다. 아사코는 자기 신장을 열고, 교실에서 신는 하얀 운동화를 보여 주었다.내가 도쿄를 떠나던 날 아침, 아사코는 내 목을 안고 내 빰에 입을 맞추고, 제가 쓰던 작은 손수건과 제가 끼던 작은 반지를 이별의 선물로 주었다.그 후, 십 년이 지나고 삼사 년이 더 지났다. 그 동안 나는, 국민 학교 일 학년 같은 예쁜 여자 아이를 보면 아사코 생각을 하였다.내가 두 번째 도쿄에 갔던 것도 사월이었다. 도쿄역 가까운 데 여관을 정하고 즉시 M 선생 댁을 찾아갔다. 아사코는 어느덧 청순하고 세련되어 보이는 영양(令孃)이 되어 있었다. 그 집 마당에 피어 있는 목련꽃과도 같이. 그 때, 그는 성심 여학원 영문과 3학년이었다. 나는 좀 서먹서먹했으나, 아사코는 나와의 재회를 기뻐하는 것 같았다. 아버지, 어머니가 가끔 내 말을 해서 나의 존재를 기억하고 있었나 보다.그 날도 토요일이었다. 저녁 먹기 전에 같이 산보를 나갔다. 그리고, 계획하지 않은 발걸음은 성심 여학원 쪽으로 옮겨져 갔다. 캠퍼스를 두루 거닐다가 돌아올 무렵, 나는 아사코 신장은 어디 있느냐고 물어 보았다. 그는 무슨 말인가 하고 나를 쳐다보다가, 교실에는 구두를 벗지 않고 그냥 들어간다고 하였다. 그리고는, 갑자기 뛰어가서 그 날 잊어버리고 교실에 두고 온 우산을 가지고 왔다. 지금도 나는 여자 우산을 볼 때면, 연두색이 고왔던 그 우산을 연상(聯想)한다. '셸부르의 우산'이라는 영화를 내가 그렇게 좋아한 것도 아사코의 우산 때문인가 한다. 아사코와 나는 밤 늦게까지 문학 이야기를 하다가 가벼운 악수를 하고 헤어졌다. 새로 출판된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 '세월'에 대해서도 이야기한 것 같다.그 후 또 십여 년이 지났다. 그 동안 제 2차 세계 대전이 있었고, 우리 나라가 해방이 되고, 또 한국 전쟁이 있었다. 나는 어쩌다 아사코 생각을 하곤 했다. 결혼은 하였을 것이요, 전쟁통에 어찌 되지나 았았나, 남편이 전사(戰死)하지나 않았나 하고 별별 생각을 다 하였다. 1954년, 처음 미국 가던 길에 나는 도쿄에 들러 M 선생 댁을 찾아갔다. 뜻밖에 그 동네가 고스란히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리고, M 선생네는 아직도 그 집에 살고 있었다. 선생 내외분은 흥분된 얼굴로 나를 맞이하였다. 그리고, 한국이 독립이 되어서 무엇보다고 잘 됐다고 치하(致賀)하였다. 아사코는 전쟁이 끝난 후, 맥아더 사령부에서 번역 일을 하고 있다가, 거기서 만난 일본인 2세와 결혼을 하고 따로 나서 산다는 것이었다. 아사코가 전쟁 미망인이 되지 않은 것은 다행이었다. 그러나, 2세와 결혼하였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만나고 싶다고 그랬더니, 어머니가 아사코의 집으로 안내해 주었다.뽀족 지붕에 뽀족 창문들이 있는 작은 집이었다. 이십여 년 전 내가 아사코에게 준 동화책 겉장에 있는 집도 이런 집이었다."아! 이쁜 집! 우리, 이담에 이런 집에서 같이 살아요."아사코의 어린 목소리가 지금도 들린다.십 년쯤 미리 전쟁이 나고 그만큼 일찍 한국이 독립되었더라면, 아사코의 말대로 우리는 같은 집에서 살 수 있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뾰족 창문들이 있는 집이 아니라도. 이런 부질없는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그 집에 들어서자 마주친 것은 백합 같이 시들어 가는 아사코의 얼굴이었다. '세월'이란 소설 이야기를 한 지 십 년이 더 지났었다. 그러나, 나는 아직 싱싱하여야 할 젊은 나이다. 남편은 내가 상상한 것과 같이 일본 사람도 아니고 미국 사람도 아닌, 그리고 진주군 장교라는 것을 뽐내는 사나이였다. 아사코와 나는 절을 몇 번씩 하고 악수도 없이 헤어졌다.그리워하는데도 한 번 만나고는 못 만나게 되기도 하고, 일생을 못 잊으면서도 아니 만나고 살기도 한다. 아사코와 나는 세 번 만났다. 세 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다.오는 주말에는 춘천에 갔다 오려 한다. 소양강 가을 경치가 아름다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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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고 싶어 하셨던 춘천에 못 가시고 향년 98세로 2007년에 소천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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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워하는데도 한 번 만나고는 못 만나게 되기도 하고, 일생을 못 잊으면서도 아니 만나고 살기도 한다. 아사코와 나는 세 번 만났다. 세 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 이 글귀가 참 학창시절부터 맘에 들어와 새로운 마음으로 펄쳐 봅니다...

피천득의 수필 “인연”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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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딱 3번 만난 여성을 죽을 때까지 짝사랑한 남성이 지은
한국의 명작 수필중 하나다.

1) 피천득은 가톨릭 성심수녀회 한국관구에서 운영하는 대학인 성심여대에 한 학기 출강한 적이 있었다. 서울에 사는 피천득이 강원도 춘천시까지 먼 길을 힘들게 다닌 것은, 성심수녀회 소속인 주매분 수녀(중국인)와 김재순 수녀(아웅산 묘소 순직 고 김재익 경제수석의 누님)가 피천득의 집을 방문해 준 것에 대한 예의 때문이기도 했지만, 또 다른 이유도 있었다. 바로 피천득과 각별한 인연이 있었던 아사코 때문이었다.

2) 17살의 봄, 피천득은 일본에서 머물게 되었다. 그는 도쿄의 미우라라는 사람의 집에서 머물렀는데, 미우라 부부에게는 '아사코'라는 무남독녀가 있었다. 아침(朝)에 태어났다고 해서 '아사코(朝子)'라는 이름을 지었다고 했다. 이것이 아사코와의 첫 만남이었다.

3) 당시 아사코는 성심수녀회 일본관구에서 운영하는 가톨릭계 여학교인 세이신 여학원(聖心女學院)의 초등학교 1학년이었다. 성심수녀회는 1800년 프랑스에서 창설되어 전 세계 수많은 나라에서 성심학교를 운영하며 교육사업을 하는 수도회로, 일본 세이신 여학원은 유치원부터 대학까지 운영하고 있는 큰 규모의 학교였다.

4) 어린 아사코는 피천득을 오빠처럼 잘 따랐고, 피천득도 아사코를 여동생처럼 귀여워했다. 피천득은 아사코에게 동화책을 선물하기도 했고, 아사코는 피천득에게 세이신 여학원을 안내해 주며 자신의 신발장과 실내화를 보여주기도 했다.

5) 피천득이 두 번째 도쿄에 갔던 것도 사월이었다. 아사코는 어느덧 청순하고 세련되어 보이는 영양이 되어 있었다. 그 집 마당에 피어 있는 목련꽃과도 같이. 그는 성심 여학원(대학) 영문과 3학년이었다. 성심 여학원 캠퍼스에 함께 갔다. 아사코는갑자기 뛰어가서 그 날 잊어버리고 교실에 두고 온 우산을 가지고 왔다. 지금도 피천득은 여자 우산을 볼 때면, 연두색이 고왔던 그 우산을 연상한다. '셸부르의 우산'이라는 영화를 피천득이 그렇게 좋아한 것도 아사코의 우산 때문인가 한다.
아사코와 피천득은 밤 늦게까지 문학 이야기를 하다가 가벼운 악수를 하고 헤어졌다. 새로 출판된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 '세월'에 대해서도 이야기한 것 같다.

6) 다시 10여 년의 세월이 흐른 후, 피천득은 도쿄의 미우라 부부 댁을 찾았다. 패전 후, 아사코는 전공을 살려 맥아더 사령부에서 영어 통번역 일을 했다. 거기서 만난 일본계 2세 남성과 결혼하였으며, 친정 근처에 따로 살림을 차렸다고 한다.

7) 피천득은 미우라 부부에게 부탁하여, 아사코의 집으로 찾아갔다. 아사코와 3번째 만남이었다. 아직 30대의 젊은 나이이건만, 피천득이 마주친 아사코는 "백합처럼 시들어가는" 모습이었다. 아사코의 남편은 미국인 같지도 않고 일본인 같지도 않은, 그저 진주군 장교라는 것을 뽐내는 듯한 사람이었다. 피천득과 아사코는 악수도 없이, 절을 몇 번씩 하며 헤어졌다.

8) 피천득은 아사코와의 3번에 걸친 만남과 이별을 추억하며,
"세 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다"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오는 주말에는 춘천에 다녀오려 한다. 소양강 경치가 아름다울 것이다."라고 수필을 마무리한다.

사색 과제

그리워하는데도 한 번 만나고는 못 만나게 되기도 하고, 일생을 못 잊으면서도 아니 만나고 살기도 한다. “아사코와 나는 세 번 만났다. 세 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다.”
귀하는 저자가 왜 세 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생각하는가.
PS 1: 피천득은 평생 세 여자를 잊을 수 없다고 했다. 그중 한 명이 아사코였다고 한다. PS 2: 피천득이 평생 잊을 수 없는 세 여자중 한 명인 따님 피서영 박사.
피서영 박사는 서울대 물리학과를 나와 미국 보스턴 대학교의 유명한 물리학 교수다.(최근에는 은퇴했을듯).남편도 MIT물리학 교수.아들은 유명한 바이올리니스트. 재미교포 모임 때 피서영 교수를 보스턴 대학교 교수라고 소개하면 그냥 지나가 버린다. 그러나 누군가가 이 분이 피천득이 평생 잊을 수 없는 세 여자중 한명인 따님 피서영이라고 소개하면 그 누구도 그녀의 곁을 떠날줄을 모른다. 반가워서 손을 잡고 난리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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